동사복사 구문은 중국어의 다른 구문과는 분명히 다른 통사적 특징을 갖는 구문이다. 이에 본 논문은 동사복사 구문의 통사적 특징을 명확히 규명함으로써 동사복사 구문의 정의와 범위를 보다 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BR> 동사복사 구문은 동사복사 구조가 술어가 되는 구문으로 통사형식은 (S)+V1+O1+V2+C+(O2) 이다. 이러한 통사형식을 갖는 동사복사 구문은 연동 구문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연동 구문과는 달리 동사복사 구문의 V1과 V2가 반드시 동형의 동사이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문법화 과정이나 정보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O1은 동사복사 구문 생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며 문장에 반드시 출현해야 하는 성분이다. V1과 O1은 이합사로 충당될 수도 있다. 그러나 V1과 O1에 위치하는 성분이 동사성이면서 V2와 부분적으로 동형인 경우는 동사복사 구문이라 할 수 없다. C(보어)도 문장에 반드시 출현해야 하는 강제성 성분으로 C가 없는 구문은 동사복사 구문이 아니다. 결과보어, 정태 보어, 정도보어, 시량보어 등이 C가 될 수 있다. 반면에 S와 O2는 비강제성 성분으로 문장에 출현할 수도 있고 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BR> 동사복사 구문은 확장 형식을 가질 수 있다. 즉 O1과 V2 사이에 시간부사나 어기부사가 위치할 수 있다. 이러한 확장 형식의 동사복사 구문은 관련 부사가 있는 긴축문과 유사한 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긴축문은 복문으로 동사복사 구문이 아니다.
This study intended to review the historical changing procedure of zai on a same format and different utilities, All those different usages are coded as zai₁ zai₂, zai₃, zai₄. zai₁ is part of predicate as existent verb; zai₂ is typical " unaction verb; zai₃ used as a proposition accompany with place, time and condition. zai₄ roles s as an adverb in front of the verb-function. his paper studied how these various functions of zai occurred by what types of grammaticalization and reanalysis. That is, the grammaticalization of zai₂ from zai₃ reveals from unaction verb to preposition: Reanalysis of zai₃ to zai₄. By searching whether the remained meaning of zai still exsit during the procedure, concluded that not only the meaning but also the composition of VP also affects to the change of grammatic structure.
중국어 모어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교육할 경우 부딪히게 되는 대표적인 문제로는, 발음 교육에서는 유음 ㄹ, 연음, 모음 ㅡ, ㅢ, 후설모음 ㅓ, ㅜ, ㅗ 등의 발음이 어려움으로 대두될 수 있다. 또한 문법 방면에서는 무엇보다도 조사의 활용이 학습자로 하여금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며, 그 중에서도 ‘은/는’ 과 ‘이/가’의 구분이 더욱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문제 외에도 중국어에는 없는 종성의 발음 문제, 종성 대표음의 발음 문제, 경어 활용 등등 더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드라마에서 학습자들이 접하게 되는 동사/형용사의 형태들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 변화 과정을 거치고 난 것이어서 초급이나 중급 수준의 학습자가 그것을 보고 기본형과 그 어미를 분리해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잘 분리해내었다 하더라도 그 어미가 나타내는 어감과 의미를 알아내기도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학습자가 드라마에서 ‘하렴’, ‘하려무나’, ‘하게’, ‘해야지’ 등등의 표현을 접하고 그 어감과 의미의 차이를 알아내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노력을 덜어주는 것이 사전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어 모어 학습자들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전을 찾고 싶어도 기본형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찾을 수 없거나 찾아도 사전에 나와 있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어 모어 학습자들의 학습 편의를 도와주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에서의 한국어 학습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중국어 학습자를 위한 한국어 어휘사전, 한국어 학습 사전, 그리고 한국어 역순 사전 등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중국인들이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로 흔히 일컽는 鄭衛之聲이란, 바로 娛人을 주 목적으로 하는 女樂이 중심이 된 연회용 악무인 것 같다. 당시 악부에는 궁중연회에서 천자와 貴人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女樂 등의 鄭衛之聲을 채집·작사·작곡·연주·공연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궁중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과 외척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한서·成帝紀》에 “종과 북을 설치하고 女樂을 갖추었다.”(設鐘鼓, 備女樂)라고 하고 있고, 《예악지》에 “천자와 女樂을 다투는데 이르렀다.”(至與人主爭女樂)라고 하고 있다. 女樂이 중심이 된 鄭衛之聲인 이 娛人의 연회용 樂舞라는 것은, 娛神이 근본 목적인 무속제의에서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淫樂한 巫舞를 추는데서 연원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孔子가 내치고 중국 유가인들이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로 여기는 이 鄭聲이란, 바로 이런 오락적 성격이 강한 음악을 뜻하다. 이로 보아 궁중에서 祭儀歌 뿐만 아니라 娛人用인 宴會詩도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궁중도서 목록을 기록한《漢書ㆍ藝文志》詩賦略 歌詩에 저록된 여러 地方歌詩들은 실은 궁중연회에서 제왕과 貴人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채집·작사·작곡·연주·공연된 지방음악인 것이다.
보통 금서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내용이 통치자의 생각과 배치될 때이고, 두 번째는 책 속에 묘사된 내용이 그 사회의 도덕 관념과 위배되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책 저자의 문자옥이라든지 개인적인 원인으로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아서이다.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지금에 보면 경서로 추숭되는 많은 서적들이 어처구니없게도 한 때는 금서로 되었던 적이 있는데, 현재로 볼 때 문화적 가치가 높게 추숭되는 것일수록 해금 된 시간도 빠르고 몇 번의 굴곡을 거친 후에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또 사회의 발전과 함께 비교적 온건하게 그 면모를 유지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대로 갈수록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세상에 나타남에 따라, 갈수록 다른 종류의 문체나 서적들이 금서가 되었으니 이러한 다른 종류의 책이 세상에 나타나면 爲政者에 의해서 나름대로 검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魯迅은 초기부터 전기까지 휴머니즘과 개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옌푸와 장타이옌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똘스또이와 니체의 휴머니즘과 개성주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옌푸와 장타이옌을 초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魯迅 초기 사상 중의 휴머니즘과 개성주의 역시 똘스또이나 니체의 것과는 다른 성격을 보인다. 魯迅의 초기 자연관은 유물론이었지만 세계관은 사적 관념론이었다 할 수 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를 접촉한 적이 있었지만, 대상을 경솔하게 믿지 않는 魯迅의 특질로 인해 그것들에 대해 유보하는 태도를 취하였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後期에 정식으로 맑스주의를 수용하기 전 魯迅이 신봉할 수 있던 정식 이론은 여전히 초기에 《천연론》과 자연과학에서 수용한 다윈의 진화론뿐이었고, 자연과 생물, 인류와 사회가 필연적으로 진화한다고 믿었다. 진화론은 결코 魯迅 사상의 전체를 개괄하거나 대표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주 그것을 언급하였다. 魯迅의 사상과 작품은 초기의 혁명적 로맨티시즘, 전기의 비판적 리얼리즘, 후기의 맑스주의 등의 중요한 발전을 거쳤다. 발전이란 止揚으로, 그 속에는 부정도 있고 계승도 있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동정과 관심, 상층 사회에 대한 증오와 투쟁은 초기와 전ㆍ후기에 연속되는 魯迅사상의 특색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賴聲川과 表演工作坊은 대만의 사라져 가던 상성을 부활 시켰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상성을 되살린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연극 장르의 하나로 재창조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점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상성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의 만담과 재담의 형태는 한 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이제는 그 종적조차 찾기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서민의 삶과 그 회한을 담아 즐거움을 익살맞게 전해주던 대중예술의 한 장르가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지나 애통하기까지 하다. 우리의 문화의 전통의 하나인 만담, 재담을 찾고 창조적 작업을 통해 새로운 우리의 대중예술로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논문의 주제와 떨어지는 얘기긴 하지만 賴聲川에 의해 재창조된 상성은 생각보다도 훨씬 풍부한 예술적 경지를 담아내고 오늘날에도 경쟁력 있는 예술 장르로서의 가치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논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상성이라는 장르가 예술적 생명력과 기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로 입증될 수 있다. 위 논문에서는 賴聲川의 작품이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도 주제의식을 매우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는 대만사회에 대한 매우 탁월한 작가로서의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성이 언어의 욕망으로 빚어진 예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반 대중과 서민들이 가장 먼저 그 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이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렇게 쉽게 적절히 포섭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의 상성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성을 잘 응용하여 시대적 상황과 대중의 욕구를 매우 탄력적이면서도 게릴라적인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상성극은 대만사회의 주요한 상황을 반영한 사회민중극이 되기도 한다.
베이징은 중국역대의 유명한 도시로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도시 속에 거주하지만 도시를 혐오하는 중국의 지식인에게 이 도시는 친근하고 향토감을 느낄 수 있는 도시로서 중국지식인의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을 여러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베이징은 사람과 도시 간에 역사와 깊이 있는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베이징과 베이징인의 문화적 경험의 공감과 정감의 그 전원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적 기억이 상실된 대도시 형상이 사실상 현실의 베이징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래서 최근의 문화서술 속에서는 베이징에 대한 향수가 시작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铁凝의 《永远有多远》이라는 질문, 즉 일찍이 풍부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가진 베이징이 과연 자신의 기억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의 물음은 답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글을 쓰면서 확고한 신념과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베이징은 현대화 과정의 어떠한 급격한 변화와 통제 속에서도 여전히 문화의 중심지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예술에의 열정으로 베이징을 유랑하는 주변인 예술가(현시점에서는 이미 그들을 주변인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왜냐하면 장위엔, 왕샤오솨이, 지아장커 그들은 이미 중국과 세계 영화세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와 그 후대인들이 베이징에서 중국미래의 문화를 새롭게 창조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베이징 전통문화는 중국 당대인의 정신적 필요에 의해서 매 시기 마다 그 시기의 담론의 내용에 의해서 재건립 될 것이다.
洪深은 창작 때 먼저 “원래의 소재를 정밀히 조사하고 분석하여,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것은 감히 취하지 않았고”, “그에게 익숙하지 못한 생활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렇게나 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분명 전형적인 현실주의 창작 방법이다. 이런 점에서 洪深은 정직한 태도로, 서술하고자 하는 사실에 “근거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력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도록 한 것”이 그의 창작 태도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農村三部曲》은 五四 이후 중국 현대연극 중에서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고 농민의 고난과 반봉건 투쟁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는 그 출현이 빨라 ‘先聲’의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런가 하면 좌익연극 초기에 대중화 사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 ‘좌익 의식’이 농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 전적으로 표현되고 강조되어 당시 ‘左翼演劇’의 대표성을 가진 작품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陳瘦竹은 말하기를, “《農村三部曲》은 洪深이 처음으로 비교적 전면적으로 강남 농촌을 묘사한 작품으로, 오사 이래 현대 희극 중에서는 처음으로 비교적 전반적인 농민의 고난과 투쟁을 반영한 작품이다.”라고 하면서 “만약 《三部曲》을 이전의 〈趙閻王〉과 서로 비교해 볼 때, 그의 反帝 反封建 사상이 더욱 철저해졌고, 그의 현실주의 예술도 훨씬 발전되었음을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작품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는 곧 洪深이 시대와 사회에 충실한 “인생을 위한” 연극이 될 수 있기를 추구한 演劇觀과 접목이 되어, 현실주의 노선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본 〈五奎橋〉를 창작할 당시에는 연극의 교육적 기능에 더욱 중점을 두고 당시 좌익문학의 시대적 요구에 모두 충실하고자 하여, 계급투쟁 이론에 부합된 논리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反封建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을 불가피하게 진보와 혁명의 완벽한 계급집단으로 설정하게 됨으로써, 예술성을 제고시킬 수 있는 ‘技巧’는 다소 소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물의 개성적 성격과 무대의 감동적 예술성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정치적 논리에 따른 선악만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작품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되기보다는 시대정신에 따른 단순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된 작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본고에서 두 번역자의 번역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두 사람은 불교의 종교적 권위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고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붓다의 완성된 모습, 위대성, 성스러움 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번역과정에 미묘한 가필이나 왜곡을 감행한다. 이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특히 구마라집의 경우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수부티(Subhūti)를 구마라집은 須菩提로, 玄獎은 善現으로 옮긴 것을 보면 직역, 의역의 원칙이 역전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구마라집은 중국인들의 쉬운 이해를 통해 중국의 사유방식 속에서 인도의 것과 유사한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현장은 인도 불교의 사유방식을 중국인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보살승(현장)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구마라집)의 번역차이는 이러한 번역원칙의 역전이 나타나는 대목인 동시에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구마라집은 인도에서 이미 극복된 소승의 수행법을 중국에서 답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보살이 추구하는 무상정등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로 수행의 목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어떻게 마음을 유지하고(住), 닦아가며(修), 번뇌를 항복시킬 것인가(降) 하는 수행방법의 질문과 답변을 옮기면서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 차이가 나타남을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구마라집이 소승의 계율주의와 수행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대승불교의 출발을 교리와 수행에도 일관되게 적용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修를 번역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본고에서는 지난 1990년부터 추진된 포동 개발·개방의 배경과 목적, 추진 과정에서 등소평의 역할, 구체적인 추진 방식, 네 개의 핵심 기능클러스터의 형성 등을 중국의 최근 자료에 기초하여 상세히 고찰하였다. 1990년 개발·개방을 시작한 이래 포동신구의 경제는 경이적인 고성장을 계속하였다. 포동의 GDP는 1990년의 60.2억 위안에서 2006년에는 2,365억 위안으로 급증해, 16년간 연평균 18.4%의 실질성장을 기록하였다. 또 2006년 말까지 외국인 직접투자 계약건수는 1만 4,910개, 계약금액은 357.1억 달러에 이르렀다. 타 성·시에서 투자한 국내기업도 9,300여 사이고, 등록자본은 600억 위안에 이르렀다. 그 결과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포동은 이제 외향형, 다기능의 현대화된 신도시로 바뀌었다. 이제 포동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경제발전 수준이 높고, 주변에 대한 파급력이 강하며,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화된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포동의 개발·개방을 계기로 1990년대 이후 장강삼각주 경제권은 전체 중국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몇 가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지난 15~16년간 포동의 개발·개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미관계의 성격이 적이면서 동반자인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 관점에서 중미관계는 상당히 유동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관계변화의 가장 큰 변수는 중미 간의 공통적 전략이익이다. 만약 미국이 과거의 정치, 군사대국에서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제적 문제에 대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미국의 대중정책은 포용론에 무게를 둔 형태로 전개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북 핵 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을 미국은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아태지역 차원에서 접근할 경우 이는 중미관계와 미일동맹, 포용론과 봉쇄론의 균형에 의해 대중관계가 결정될 것이다. 또한 미국이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대해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양국관계는 경제, 대만문제, 미일동맹 강화, MD체제 수립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갈등의 측면이 부각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가장 심각한 것은 대만문제로 중국 내 일부 연구자들은 향후 15년 내에 대만해협에서의 충돌 가능성이 한반도에서의 무력충돌 가능성보다 훨씬 높다고 보고 있다. 중미 양국의 관계는 여전히 냉전적 사유가 존재하고 그에 따른 위협요인이 상존하고 있는 아태지역의 안정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최근 북핵 문제와 지역에서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으로 대표되는 非전통 위협요인에 대한 중미 양국의 건설적이고 협력적인 태도에서 증명되고 있다. 결국, 중미 양국이 아태지역 안보문제에서의 협력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인식상의 불일치 혹은 정책수단의 차이에 대한 정책조정이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고, 아울러 이러한 정책적인 부분에서의 조정은 중미 양국이 상대방에 대한 건설적 협력의 필요성을 공동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의 향후 정책은 대만통일과 대국으로서 아시아에서 미국, 일본, 러시아 보다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경제발전을 도모하여 21세기 중반까지는 경제 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